뭉툭한 연필을 참지 못하는 나. 연필을 날카롭게 깎는다. 그제야 노트에 글을 적거나, 책에 밑줄을 긋는다. 또 뭉툭해지면 연필 끝이 날카로워질 때까지 다시 깎는다. 날카로운 흑심이 처음 종이와 만날 때의 감각을 사랑하기에.
그럼에도 1년 전쯤부터 최근까지, 난 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이런 감각의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무뎌진 연필심처럼, 내 모든 감각의 더듬이가 무뎌졌다.
세상에 무뎌지니, 내 세상이 무너졌다. 최근 건강검진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사람들이 너무 걱정할까 봐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나에겐 큰 충격이었기에 조심스럽게 밝혀본다.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날짜도 또렷이 기억한다. 2022년 2월 14일. 소파에 앉아, 한없이 울었다. 관계의 상처였다. 울음이 그치지 않았고, 소파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울다 무서움까지 느꼈던 날. 그래서 친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날은 그 덕분에 다행히 잠에 들었다.
그날부터 천진난만했던 내 얼굴엔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도 심각한지... 늘 머리에, 정확히 관자놀이에 힘을 잔뜩 주고 살았다. 힘을 주고싶지 않았으나 의식할수록 힘은 더 강하게 들어갔다.
청명한 하늘에, 산들거리던 바람에, 스치는 좋은 향기에 행복을 느끼던 나였다. 그런 내가 그런 하늘에, 그런 바람에, 그런 향기에 웃고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를 심각히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을 때였고, 심각하게 생각하면 진짜 심각해질까봐 무서워서.
그렇게 좋은 감각에 무뎌지고, 외면하여 인색해지니, 마음의 병까지 찾아온 게 아닐까.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에 심각성을 깨달았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일을 그만뒀다. 내가 더 병들까봐 무서워서. 그리고 내가 진짜 무엇을 잃어갔는지 깨닫게 되었다.
외로움. 나란 인간에게 외로움의 감정은 가끔은 달았지만 대부분 쓰라리고 아팠다. 팀장이니까, 혼자 사니까... 외로움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며 나를 방치했다. 그것이 멋진 삶이라는 착각 아래, 나는 점점 병들어 갔다. 회사에서도, 홀로 자취방에서도, 그 누구도 나를 외롭게 하진 않았으나 자꾸 난 외로움 뒤로 숨어들었다.
외로움이 덮친 나는 결국 '사랑'을 감각할 수 없게 했다. 사랑 없는 나는 스스로 내 마음을 잡아먹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더 아프기 전에 알게 되어 다행이다.
마음의 병을 진단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에 알리는 것이었다. 괜찮은 척하기 싫었다. 괜찮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뻥뻥 뚫려 너덜너덜했으니까.
관계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놀랍게도 조건 없는 사랑으로 채워지더라. 잔뜩 힘을 줘 강한 척했던 나에서 한없이 힘 풀린 약한 나로,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니 다들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사랑 중 제일은 부모의 사랑이더라. 우울증 진단 후 가장 먼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본가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아빠는 '너가 너무 혼자 있어서 그래'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나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니셨다. 딸과 함께여서 좋다는 말과 함께.
엄마는 걱정은 컸으나 내색하지 않으셨다. 애교나 표현에 인색하던 엄마는 매일 아침 나를 사랑으로 안아주며 깨웠고, 따수운 밥을 먹였고, 늘 무엇이 먹고 싶냐 물었다. 구멍 뚫린 심장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새살이 돋아나며 채워져 갔다.
친한 오빠가 '사람을 많이 만나라'고 했다. 작년 2월 14일 나의 그 전화를 받아주었던 고마운 오빠이기에, 최근 몇 주 동안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역시는 역시였다. 나에겐 좋은 인연이 가득하다는 걸 예민하게 감각하게 되었다.
무조건 내 편. 니 편 내 편 가르는 게 어리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조건 내 편인 사람들 덕분에… 돋아난 새살에 조금씩 근육이 생기는 것도 같았다. 반성은 내가 알아서 하는 걸 그들도 알았던 걸까, 무조건 사랑만으로 나를 채워주는 이들이 정말 고마웠다.
기분이 이상했다. 강함보다 아픔을 드러내니, 그 순간의 공기는 사랑의 향기가 넘쳐났고, 우리는 전보다 훨씬 편해지고... 가까워지고... 뭉쳐졌다. 이 글을 빌려, 나를 다시 일으켜 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 마음의 병을 이 글로 처음 알게 된 지인도 있을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으니 말이다. 자연의 놀라운 회복 속도를 나로서 증명했답니다(?)
그다음 내가 한 것. 일상의 좋은 더듬이를 예민하게 다시 켜기 위해 노력했다. 봄이 가득 담긴 노랑과 연두 사이의 나뭇잎들을 많이도 찍었다. 자연의 색을 눈에 담고 싶어, 간직하기 위해 많이도 찍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돋아난 새로운 나는 이제 청명한 하늘뿐 아니라, 비오는 하늘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썩은 마음을 뿌리째 뽑아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흙을 고르고, 사랑의 씨앗을 다시 심으니, 뿌리가 힘을 내어 흙의 사이사이를 뿌리가 채우니, 비로소 다시 새싹이 돋아나더라.
무뎌지면 무너진다. 내 경험담이다. 무뎌지니, 무너졌다. 무뎌진 연필을 다시 연필깎이로 깎아보자. 이제 다시 일상을 예민하게 사랑으로 감각하는 내가 되어, 지금의 행복을 유보하지 말아야지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