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10일을 쉬었다. 쉬었다고 하기엔 오히려 복잡했지만. 처음 3~4일은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잠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싶을 정도로. 쉼의 중간쯤 되었을까, 나는 생각보다 값지고 중요한 걸 깨달았다.
쉼의 시작부터 나는 줄곧 '왜 why'에 집착했다. 나는 '왜' 살까, 나는 '왜' 힘들까, 나는 '왜' 쉬는 게 어렵지... 그럴수록 점점 우울해져만 갔다.
나는 철저히 Why형 인간이다. '왜'가 납득되어야 움직인다. 그러고는 스스로 되게 뿌듯해했다. '왜'를 묻고 파고드는 내가 멋지다고. '이유'를 궁금해하는 내가 멋지다고.
그러다 듣게 되었다. 세상에 Why형 인간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충격이었다. 어리석게도 소수라서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Why형 인간이 많이 포진된 회사는 오히려 속도가 나지 않고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더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이유 why'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도달해야 할, 깊고 숭고한 무언가라 생각했다. 사실 맞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온종일... 며칠... 아니 몇 달을 Why만 붙잡고 있으니, 투명한 유리 어항에 갇힌 물고기 같았다. 그 누구도 날 가두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유 why에 집착할수록, 자꾸 거대한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밖은 보이지만 절대 나갈 수 없었다. 그러면서 누군가 떨어뜨려 주는 밥을 잘도 받아먹었다. 딱 어항에 갇힌 물고기처럼.
쉼의 중간에서 깨달은 것. 이유 why도 가벼울 수 있다. 아니, 가벼워도 된다. 무거워야 할 필요가 있나? 없었다. 이유가 그리도 무거우면, 시작도 전에 지쳐버린다는 걸 몰랐다.
'기분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재밌으니까' 이것들이 이유일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가볍다 판단했던 이런 이유들이 사실 본질과 본성에 더욱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벼워 보이지만, 가볍지 않다.
어떤 크나큰 대의 大衣만이 옳은 이유는 아니라는 것. 그것을 몰랐다. 일도, 삶도, 모든 것이 대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로 시작한 고민의 끝은 늘 '세계 평화'까지 닿았다. 내가 세계 평화라니, 말도 안 돼...' 그러고는 그것이 너무나도 커서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다시 뇌에서 지워버렸다.
물론, 어떤 순간엔 대의나 사명을 가져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내가 커다란 대의를 갖고 시작해야 할까? 기분 좋음 Feel Good에서 시작할 수 없을까? 재미 Fun에서 시작할 수 없을까? 나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진지해졌을까.
시작의 이유는 가벼울 수 있다. 이유의 경중 輕重이 그것의 옳고 그름은 따질 수 없다. 그 경중 또한 객관적일 수 없으며, 나 혹은 타인의 관점일 뿐이다. 귀가 얇은 난 너의 이유가 가볍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나도 많이 새겼나 보다. 깊이 파이진 않았길 바라며, 지우개로 쓱쓱 지워 내본다.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해본다.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생각해보면 운동도 몸의 움직임이 가벼워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마음은 왜 그리도 무거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리석었다. 몸과 마음은 같은 원리일 텐데 말이다.
나는 이제 '왜 why'보다 '어떻게 how'에 더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철학적 질문은사실 why보다 how에 있다는 걸 책에서 본 적 있다. '나는 왜 사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철학적 질문이라는 것. (책은 아마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였던 것 같다)
이유에 집착한 그 시간들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나를 주기적으로 아프게 했다는 사실도 부정하진 않는다. 이제는 why를 조금 내려놓기로 하자.
이렇게 적어 내리다 보니 이유를 묻는 질문들이 나를 괴롭힌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던진 Why의 질문은 오히려 바깥을 향하고 있었구나. 바깥에 답이 있는 듯이 묻고, 꼭꼭 숨겨진 그 답을 찾아내려 했던 것 같다. 누군가 설계해놓은 판에 있는 양, 바깥을 향한 질문을 why의 형식으로 많이도 던졌다. 결국, '나 왜 살까?'와 같은 질문은 날 더 절망하게만 했구나.
How의 질문이나에겐 훨씬 더 주체적인 질문이었다. '나 어떻게 살까?'하는 질문은 왠지 모르게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질문이 시작의 설렘과 꽃 같은 활동성을 쥐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관성을 거슬러야 한다. Why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인간이기에, 의식적으로 How로 치환하여야 한다. 어렵겠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더 윤택해지게 만들 거라 믿는다.
실전이다. 조금 더 생활에 닿아있는 질문을 바꿔볼까나. '나 왜 돈 없지'보다 '나 여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오케이! 이렇게만 바꾸면서 살아가보자.
지금 나에게 던져지는 Why의 질문들을How로 치환해 보는 연습. 그렇게 치환해 본 몇몇 질문은 벌써부터 살고 싶게 하는 향긋한 봄만 같다. 설레고, 경쾌하고, 따듯하고...
사실 Why냐, How냐, What, If냐... 가 중요한 것 같진 않다. Why의 질문도, What의 질문도, How의 질문, If의 질문도 모두 중요하다. 질문의 종류에 대한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Why형 인간이라 Why만 던지고 실행도 전에 지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쓰는 글임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질문의 방향이 나를 기준으로, 바깥 Outside을 향하는지 안쪽 Inside을 향하는지가 중요하다. 그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난 Why형 질문이 제일 헷갈렸다. 내가 던지던 Why의 질문들은 보통 안쪽을 향하는 듯 보였으나 바깥을 향한 질문이 꽤나 많았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안 Inside를 가장한 바깥 Outside를 향한 가면 쓴 질문을 이제는 고이 보내주려 한다. 바깥의 거대한 별보다 내 안의 소우주를 향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보기로 한다. 어렵겠지만 나에게 생기는 질문을 멀리서 관찰하고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나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첫 이자 끝 사람은 나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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