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기차와 같다. 좌우로의 떨림, 급작스러운 덜컹거림, 누군가의 소란과 난동, 위아래의 파동, 뜻밖의 사고까지. 급정거와 같은 비교적 작은 돌은 미리 대비해 대처할 수 있고, 탈선과 같은 크나큰 바위는 대비할 틈도 없이 우리를 집어삼킨다.
하지만 나의 인생에 크나큰 바위가 찾아올 확률은 낮다. 그러나 나는 작은 돌도 큰 바위처럼 맞는 경우가 아주 많다. 어찌 보면 대비도 중요하지만, 작은 돌을 작은 돌로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작은 돌을 큰 돌로 판단할 때의 대표적인 특징은 '불평불만'이다. 어딜가나 불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작은 돌도 스스로 큰 바위로 부풀려 스스로 안에 들어가 깔린다. 불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불만' 앞에는 늘 '이해'가 있다. 이해할 건지 말 건지는 자신이 택한다. 이해의 역치를 높이거나 낮추는 정도, 즉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는 정도로 불만의 세기가 결정된다.
그리고 불만 많은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수준을 높다고 말한다. 맞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늘 수준 높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은 스스로 큰 바위에 깔려 불행을 택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나는 불평불만이 생길 때 이렇게 치환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지?"
더욱 깊이 들어가 보았다. 불만의 앞에는 이해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해'에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흑백논리, 우월주의, 자기혐오, 낮은 자존감…
하지만 나는 이해 앞에 있는 2가지에 대해 더 생각해보았다.
그 2가지는 ‘관성과 참여’다.
관성의 정의는 이렇다.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총합이 0일 때,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 하지만 부정적으로 쓰이는 내가 한 관성의 정의는 이렇다. '변화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는 경향' 아, 정확하게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다. '적응하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는 경향'
나는 이것을 늘 경계하려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고이고 결국 썩게 되니까.
가만히 있는 것을 침대 안, 변화하는 것을 침대 밖이라 표현해보자. 침대 안은 안전하고 안정적이라고 스스로 느끼는 관성이다. 침대 밖은 희망과 절망의 경험 섞인 세상이다. 하지만 침대 안이 꼭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버스가 갑자기 멈췄을 때 튀어 나가 죽는 것처럼 관성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거의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결국, 침대 밖으로 뛰쳐나가야 경험이 쌓인다. 희망찬 성공은 나에게 좋은 결과를 남기고, 절망찬 실패는 나에게 새겨질 교훈을 남긴다. 우리의 영혼은 침대 안에서 가만히 정체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피어나는 생명력이 우리를 일어나라고 정직하게 깨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침대 안에 있으면 평가하게 되고,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를 상실한다. 그렇게 하는 불평불만은 나를 큰 바위에 짓눌리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결국, 침대 밖 세상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다.
이런 말을 들었다. "리스너가 되면 평가하게 된다." 침대 안은 리스너가 되어버리는 환경, 침대 밖은 참여자가 되어버리는 환경이다. 스스로 별것도 아니면서 평가질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이쯤 되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그만하고 이해되지 않았던 것에 바로 참여해봐야겠다.
최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달리기>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달리기의 좋은 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나의 삶에 들이기에는 나의 여러 가지 필터링을 걸쳐야 했다. "달리기하면 진짜 나한테 좋은 거 맞아? 달리기하면 추운데.. 달리기 말고 딴 거 없나?" 등.
그렇다. 나는 여전히 달리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평가'하고 있었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러한 글을 쓴 이상, 나도 달리기에 참여해보아야겠다. 달리기를 참여해보고 나서 나의 삶에 들일지 말지 생각해도 늦지 않다. 이제 달리러 나가야지!
다시 기억할 것 정리.
- 불평불만이 폭발하는 시기에는, 내가 무엇이 이해되지 않는지 점검하자.
- 이해되지 않는 것에 부딪혔다면, 그것의 원인을 찾아 고쳐본다. 원인이 ‘관성’에 의한 것이라면, 기꺼이 ‘참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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