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록을 꽤나 좋아하는 인간이다. 전부터 일기보다는 배운 것을 기록하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도 선생님의 농담까지 적었던 그런 기록중독 학생이었다. 그렇게 난 기록한 것을 토대로 학교 시험을 내가 노력한 것보다 더 잘 봤던 것 같다. 단, 수능 빼고 말이다.
벼락치기형 인간. 그게 나였다. 순간의 암기력이 뛰어났던 나. 그래서 흔히 수시라고 말하는 학교 시험은 잘 보았었다. 하지만 수능은...? 망쳤다. 그것도 아주 대차게 망쳤다. 핑계라면 핑계일 것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학생과 같은 반에서 수능을 쳤다는 것? 그걸 지금까지의 수능을 망친 핑계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수능을 망쳤는지. 나는 수능을 왜 망칠 수밖에 없었는지. 수능이라는 시험은 순간의 암기력으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랬다. 순간의 암기력이 좋았던 나는 시험이 끝나면 모두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의 뇌에 빠르게 쓰여진 지식은 시험이 끝난 당일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더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학창 시절엔 순간의 암기력으로 잘 볼 수 있는 시험이라도 있었네. 하지만 사회에 나와보니 그런 시험은 남아있지 않았다. 시험 성적만을 위한 암기가 문제였을까, 벼락치기를 즐겼던 나의 문제였을까? 기록을 잘한다고 해서 인생이 나아질 것이란 이 꽃 같은 생각은, 수능 성적을 받는 날 와장창 깨져버렸다.
20살이 훌쩍 넘은 지금, 나의 세상엔 시험은 없고 풀어야 할 문제만 굉장히 많다. 문제를 푸는 건, 기록만으로 되지 않았다. 마음과 패기만으로도 되지 않았다. 여전히 기록은 하고 있지만, 요즘 나에게 '기록'이 한 번 더 양날의 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세상은 더 냉정했다. 기록만 한다고 내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기록이 축적된다고 해도, 내 삶이 대단해지지 않았다. 좌절스러웠다. 나름 내가 공부하는 스터디에서 '주효정+조선왕조실록=주선왕조실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록은 쌓여만 갔다. 그렇게 쌓여 먼지 가득한 기록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를 보며 느낀 점을 공유하고 싶다.
생각만 한다고, 기록만 한다고... 내것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외부 레퍼런스를 보고 기록해두었다고 내 성과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랬다. 결국, 내 것이 되어야만 삶은 변화한다.
중요한 건, '실천'이었다. 한번이 아니라 계속 실천하는 것. 계속 실천하기 위한 중간 단계에 '기록'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드는 단계를 크게 5가지로 나누어보았다.
생각 → 기록 → 암기 → 실천 → 일상
생각만 한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기록만 한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암기한다고 내 것이 되지도 않고, 몇 번 실천한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내 뼈에 새겨질 만큼 실천하여 그것이 일상이 되었을 때 그제야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기록이 왜 나에게 위험했을까? 왜 나의 무기가 되기도 했지만, 나를 겨냥하는 적이기도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기록은 나에게 '안심'을 주었다. 내가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어딘가에 써놓았다는 안심. 하지만 그 안심이 나의 실천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중에...'
써뒀으니까 나중에 봐야지, 나중에 실천해야지. '나중에...'라는 마법 같은 단어로 나는 언젠지도 모르는 나중에 성장할 예정인 인간으로 스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내가 기록했다는 걸 까먹기라도 하면, 그런 인간은 절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나의 정말 안 좋은 습관 하나. 좋은 글들을 나중에 보려고 마구 저장해두는 것. 그렇게 저장된 글은 아마 수천 개가 되겠지만 그중 단 하나도 읽지 않았다. 그것들을 다 읽고 일부 실천했더라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나에게 남은 또 다른 질문... '그렇다면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수많은 콘텐츠를 모두 기록할 필요 없다. 어차피 다 암기도 못 하고, 다 실천도 못 하니까. 그래서 난 내 삶에 적용할 것들만 엄선하여 기록, 암기하고 실천하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수천 개의 콘텐츠를 저장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
기록은 나에게 양날의 검과도 같지만, 기록을 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장점이다. 이제는 기록을 내 것으로 만드는 단계를 알게 되었으니, 암기하고 실천하다 보면 어느새 더 멋진 인간이 되어있지 않을까? 두고두고 기억할 문구를 적으며 오늘의 뉴스레터를 마친다.
생각했다 ≠ 내 것이다
기록했다 ≠ 내 것이다
암기했다 ≠ 내 것이다
실천했다 ≠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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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다 =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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