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좋은 구절을 발견하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고, 새로운 개념을 배우면 몇몇 동료에게 말로 설명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동네방네 배운 걸 뽐내고 티 내는 인간. "동네사람들! 여기 보세요! 제가 이걸 알게 됐어요!"라고 크게 소리쳐 이목을 끄는 인간. 그런 인간, 바로 나다.
놀랍게도 이런 행동은 남에게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고 싶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 개념을 정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림을 그려보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건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한 행동이 상대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고 그럴 땐 상대가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이 좋게 발현되는 순간인 것 같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결과가 정말 참담하다. 나와 모두를 불구덩이에 처박아버리는 그런 끔찍한 결과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나와 정말 다른 강력한 개념을 만났을 때, 어느 때보다 성장의 통증을 크고 오래 겪고, 그 통증을 주변인에게 전이시키는 것. 오히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통증 섞인 부정적인 감정이 말과 행동에 투명하게 드러나 모두를 아프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최근 3개월이 나에게 그런 시기였다. 팀장으로서 팀원들을 힘들게 했던 그런 날이 계속됐었다. 몇몇 우리 팀원들도 이 뉴스레터를 보고 있겠지만... 여과 없이 솔직한 감정을 담아보고자 한다.
내 부정적인 감정이 그대로 투명하게 말과 행동에 드러났던 나날들. 난 팀장이 이렇게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좋을 땐 전혀 알 수 없었다. 좋을 땐 내 영향보다는 '모두가 좋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크게 휘청거리니, 팀원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 크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연필심을 끝을 잡고 흔들면, 연필의 끝부분은 더 큰 궤적으로 흔들리는 원리도 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흔들리지 않았던, 행복했던 시기엔 '그냥 연필이다!' 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좋을 땐 몰랐던 것들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나에게 그 3개월은 인생을 통틀어 역대급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내 부정적인 감정이 그대로 투명하게 팀원들에게 전달되었고, 나와 팀원들의 신뢰라는 틈을 점점 벌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힘들어졌고, 그것이 또 전달되는 악순환이 반복된 그런 3개월이었다.
그렇게 나는 '투명하다'와 '솔직하다'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또, '투명한 것'과 '감정을 상대에게 속여 드러내는 것'도 동의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투명하다는 건, 감정을 깨끗이 비워내는 것. 그것이었다. 감정은 반드시 드러나기 때문에, 감정을 속여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감정을 깨끗이 관리해야 하는 거였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는 말도 틀렸다. 기분은 태도에 반드시 드러난다. 그래서 기분과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명상과 반성의 글쓰기를 강조했나보다.)
온갖 티 내며 성장하는 인간. 그런 나라는 인간은 장단점이 뚜렷하다. 좋은 감정일 땐 모두에게 이로운 이야기를 널리 전이시킨다. 하지만 나쁜 감정일 땐 모두에게 해로운 감정만을 더 빠르고 더 널리 전이시킨다.
나쁜 감정이 솟구치던 시기를 돌아보면, 내가 안간힘으로 버틸 때였던 것 같다. 성장할 땐 반드시, 적어도 한번은 져야 한다. 성장에 win-win은 없다. 내가 알던 개념을 확인하는 건 성장이 아니다. 성장에는 승리와 패배가 반드시 존재하고, 패배하는 건 반드시 나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패배는 내가 보지 못한 걸 깨닫고,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성장이 일어난다.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왜 부정적인 감정이 들끓어 나를 삼켰을까? 결국 난 잘 지는 법을 몰랐다. Good Loser가 되는 법을 몰랐다. 성장할 때 반드시 패배하기에 잘 져야 하는데,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티다가 꺾여 Bad Loser가 된 것이다. 대차게 꺾여 부러진 그 순간들에,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감정과 에너지가 분출된다. 그렇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에너지를 분출하여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Good Loser가 되는 법을 모르겠다. 지금은 장장 3개월간의 내 안의 전투에서 이제서야 패배를 인정하고 그저 고요해졌을 뿐이다.
내가 성장을 위해 알을 깨고 나가려 할수록, 점점 큰 벽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매번 더 두꺼운 껍질을 탈피해야 하는 랍스타처럼 말이다. 랍스터는 너무 두꺼워져 버린 껍질을 탈피하지 못하면 결국 죽는다고 한다. 랍스타는 점점 더 어렵고 힘든 탈피에 더 큰 에너지를 써 비로소 탈피해야만 살아남는 원리로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인간도 같다. 나를 깨는 탈피가 두렵고 무서워 버틸수록, 그 안에서 난 점점 죽어간다.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모든 것에 패배를 인정하는 것 또한 나를 더 병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게 성장을 만들고, 어떤 게 날 시궁창으로 보낼지... 그런 안목이 없어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아직 나에게 성장과 시궁창을 거르는 제대로 된 거름망이 없기에 일단 버티고 보는 것 같다.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되니까... 야호! 이건 성장이었구나!, 퉤! 이건 시궁창이구나.
그 거름망은 빨리 만들 수도 없다. 조급한 마음에 거름망을 내 기준으로 빠르게 만들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왜곡하여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거름망은 신중하게 시간을 들여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거름망을 만드는 일. 최근 본 콘텐츠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코리아 넘버원>의 '죽방렴 멸치(남해)' 편에는 그물에 멸치만을 남겨 건지기 위해 여러 가지 종류의 거름망이 나온다. 첫 번째 작업할 땐 해초 같은 부산물을 거르기 위해 구멍이 가장 큰 거름망을 쓴다. 두 번째 작업할 땐 그보다 구멍이 작은 거름망으로 멸치보다 큰 물고기들을 건져낸다. 여러 번 작업을 하고 나면 마침내 멸치들만 남는다.
멸치처럼 어떻게 걸러야 하는지 명확한 과정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나에게 그런 건 없다. 잘 지는 법과 잘 거르는 법을 알게 될 때까지는, 계속 동네방네 감정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겨를 없이... 티를 내며 성장할 것 같다. 아... 잘 지는 노을 같은, 잘 거르는 거름망 같은...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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