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시야를 갖는 법이 궁금했다. 넓은 시야를 가진 자들이 부러웠다. 넓은 시야를 갖는 원리만 안다면 더 이상 부럽지 않을 것 같은 묘한 확신도 있었다. 그래서 지난주에 질문을 가져갔다. 지금의 내 선생이라 생각하는 분께 말이다. 넓은 시야를 갖는 법에 대해 질문을 했고, 그에 대한 답과 함께 질문 자체도 잘못되었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흑백논리 黑白論理. 문제의 옳고 그름을 가릴 때 흑과 백 두 가지 선택만으로 판단하는 논리. 여러 가지 선택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그르다는 식의 극단적인 판단. 두 가지 극단 이외의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편협한 사고 논리.
위에 적힌 '흑백논리'의 정의 안에 좋은 구절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평가 놀이를, 우월주의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최근 나의 마음을 괴롭혔던 요소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까지 돋았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그 마음. 그게 나를 병들게 했던 건 아닐까?
내 질문 중 잘못된 포인트는 이거였다. 질문의 상대는 매일 밤 함께 공부하는 커뮤니티 리더님이었다. "넓은 시야를 갖는 방법이 궁금해요... (중략) 뜻이라는 비전을 세우면 구조를 잘 짜면 매출은 알아서 따라오지 않을까요? 그러면 비전이 더 중요한가요?" 이런 식의 질문이었다.
여러분이 읽어도 잘못된 점이 바로 보일 것이다. 나도 다시 보니 그렇다. 그런데 구두로 질문할 땐 전혀 몰랐다. 나는 속으로 아직도 비전을 쫓는 건 좋은 것이라 옳고, 돈을 버는 건 나쁜 것이라 그르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분명 버렸다고 행복했는데... 망연자실했다. 역시 나는 아직 멀었다.
비전은 우리가 다른 길로 새지 않도록 단단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 매출보다 더 정확하게 순이익(돈을 남기는 것)은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배부르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비전만 있고 이익이 나지 않는 회사는 대표 자신뿐 아니라 그 회사를 선택한 구성원도 괴롭게 만드는 아주 악독한 회사인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흑백논리를 펼쳤을까?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의 사고방식. 편협한 이분법적 사고. 이 질문을 통해 내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우월주의'가 내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우월주의가 말했다. "효정아, 나 아직 너 마음속에 살고 있어 😈"
생각해보니 아직도 나는 '내가 더 우월하니 내가 맞아'라는 마음과 '당신이 더 우월하니 당신 말이 맞아'의 사고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뇌에 박히도록 새겨야지. '나와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이다. 사람의 높고 낮음은 없고, 그것을 내가 평가할 수도 없다. 평가 놀이, 우월주의 제발 버리자.'
그렇게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는 내 눈에 모래를 들이부은 것처럼 내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했다. 이제 눈을 다시 씻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자.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말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자.
시야는 input과 시간의 곱으로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시야 = input*시간" 시간이라는 속성은 밀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두에게 하루 24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한순간에 input이 몰려왔다고, 시야가 생기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쌓여야 시야가 생기는 것이다.
그가 말해준 공식은 정확하게 "넓은 시야 = input*시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넓은'이라는 단어를 걷어냈다. 내가 변형한 건, '넓은 시야'의 공식이 아니다. '시야'의 공식이다. 넓은 시야를 갖는가, 좁은 시야를 갖는가는 input에 달려있다. 정확하게는 input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지에 달려있다.
같은 input이라도 모두에게 같은 output이 도출되진 않는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또 해석하고 싶은 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정확한 정보 하에 나에게 적용하고 직접 실행해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든 자. 이 둘의 output은 전혀 다를 것이다. 전자는 input과 시간이 결합하여 '좁은 시야'를 가지게 된다. 후자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다.
흑백논리와 input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input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필터를 거친다. 그 필터의 왜곡된 정도, 혹은 필터 유무에 따라 좁거나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필터의 왜곡을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흑백논리인 것이다.
최근 회사에서 서로 너무 공고한 2가지 다른 의견을 논의하며, 회의 참석자 모두가 굉장히 힘든 적이 있었다. 2주에 걸친 그 논의는 다행히 마지막에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론이 났다. 모두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잘 합의한 것이었다.
2번의 회의였다. 첫 번째 회의에서는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며 자신의 논리를 단단하게 만들만한 사례만을 덧붙이고 주장했다. 완전히 흑백논리를 서로 펼쳤던 것. 두 번째 회의 전에 대표님께서 자신이 흑백논리를 벗어나겠다는 뜻을 담은 진심의 메시지를 남겼다. 나도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한 근거도 찾아보자고 모두에게 제안했다.
두 번째 회의를 시작할 때,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첫 번째 회의가 모두 힘들고 지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회의는 의외로 평탄하게 흘러갔다. 의견이 부딪히긴 했지만, 결국 두 의견 모두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고, 우리는 두 의견의 층위를 정리하고 잘 마무리했다. 그것이었다. 모두가 흑백논리를 벗어나는 것이 모두를 웃게 했다.
흑백논리와 같은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질 좋은 input을 사실대로 나에게 주입하고 output을 만들고, 그 시간이 쌓이면 전보다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원리였다.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조급함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 공식처럼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은 내가 조급함을 갖는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신 같은 24시간 중에 input에 시간을 더 확보하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게으름, 귀찮음에 학습을 타협하지 않는 것. '타협은 내 의지와 엿 바꿔 먹은 것이다.'라는 말이 요즘 나를 계속 맴돈다. 소파에 잠시 누웠다가도 나를 벌떡 일으킨다.
밀도 있는 input의 시간을 내 삶의 루틴으로 만든다면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절대적인 시간에서는 조금은 빠른 속도로 넓은 시야를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도 결코 조급해하진 않아야지. 1달 만에 뚝딱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뭐든 급하게 하면 체하니까. 나이테처럼 시간이 만들어주는 성실의 주름이니까.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면, 20살의 나와 30살의 나는 정말 다른 사고를 하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10년을 잘 살아내면 40살의 나는 30살보다 더 높은 레벨로 껑충 뛰어있을 테니까.
세상은 스펙트럼이다. 이상한 프리즘 안경을 쓴 채 세상을 흑백으로만 보았던 그 세월을 반성한다. 나만의 이상하고 뒤죽박죽한 흑백 세상에 갇히지 않도록 나를 혼내줄 사람을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겠다. 내가 또 세상을 흑백으로 보고 있다면, 누군가 나의 등짝을 시원하게 때려주었으면 좋겠다. "야! 효정아! 너 정신 차려! 세상은 흑백이 아니라 무지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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