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산다. 사랑하든, 미워하든, 존경하든. 나는 사포인가, 가시인가, 대못인가, 바람인가? 나는 어떤 자극을 주는 사람일까?
나란 사람도, 어떤 이에게는 사포 같은 사람, 어떤 이에게는 가시 같은 사람일 거다. 그럼에도 사포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 사포같이 자극을 주지만, 상대를 더 빛나게 하는 그런 사람.
지금까지 난 대못 같은 사람이었다. 세상, 유해한 사람. 그것은 상대를 품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대를 바꾸려 했기 때문이었다. 난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못처럼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다.
특히 바뀌려는 의지가 없는 자에겐 더 치명적이었다. 결국, 싸우게 되었으니까. 사랑했던 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했으니까.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들을 많이도 잃었다.
나의 존재만으로 남에게 자극이 된다. 모든 존재가 서로 자극을 주고받는다. 지금 나의 책상은 글 쓰는 나의 팔꿈치에 자극을 전달한다. 밝은 노트북 화면은 내 눈에 눈부신 자극을 전달한다. 그렇게 나도, 자연과, 사람들과, 사물과 자극을 교환한다.
존재만으로 자극이었던 내가, 말로도 얼마나 많은 자극을 주었을까? 지금껏 내가 유해한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모두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살기에 난 반드시 누군가에겐 나쁜 자극을 주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몰랐다.
어렸을 적,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 송희에게 난 대못 같은 사람이었다. 송희를 바꾸고 싶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땐 내가 정답이라 생각했다.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송희는 다행히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많은 자극을 준 나를 송희는 품을 줄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상대를 사랑하더라도, 나 말고 다른 이는 바꿀 수 없다. 다른 어떤 이도 품을 수 없다. 그의 부모도 바꾸지 못했던 자식들이다. 누군가 나에 의해 바뀌었다면, 그것은 착각일거다. 트리거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사람이 스스로 바뀐 것이기 때문.
세상에 모든 이가 이 진리를 알면, 적어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나에게 가시 같이 잘 맞지 않는 사람과는 애초에 관계를 시작조차 안 하지 않았을까? 나도 서른이 된 지금에서야 이걸 알았다. 30년 동안 나의 존재만으로, 나의 말로, 나의 행동으로 자극을 주었던 이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내가 원치 않는 삶에 나를 끼워서 맞추려는 자에게서는 멀어질 것.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자와는 가까워질 것. 나에게 바뀌라 명령하는 자에게서는 멀어질 것. 나를 나로서 사랑한다는 자와는 가까워질 것.
하, 휴대폰의 밝기 조절처럼 나에게 자극을 주는 모든 것들의 강도 조절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나마 이뤄지기 힘든 것에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명상하면 조절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살포시 해본다.)
그래도 이왕이면, 난 사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차피 자극을 주는 삶이라면, 다른 것을 더욱 빛나게 할 자극을 주는 그런 사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은, 상대를 빛나게 하는 사포입니까?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 가시입니까? 피까지 흘리게 하는 대못입니까? 아님, 기분 좋게 하는 선선한 바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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